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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요시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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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1684년 기슈번에서 태어나, 1716년 도쿠가와 막부의 8대 쇼군이 되었다. 그는 기슈 번주 시절부터 재정 개혁을 추진했고, 쇼군 취임 후에는 교호 개혁을 통해 막부 재정을 안정시키고 사회 여러 분야에서 개혁을 단행했다. 검소하고 검약을 중시하며 무사들의 풍속 개선을 강조했고, 쌀값 조절, 토지 개발 장려, 상미령 시행 등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1745년 쇼군직을 장남 이에시게에게 물려주고 오고쇼가 되었으며, 1751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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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요시무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도쿠가와 요시무네
도쿠가와 요시무네 초상 (도쿠가와 기념 재단 소장)
이름도쿠가와 요시무네 (徳川 吉宗)
요시무네 (吉宗)
시대에도 시대 중기
출생1684년 11월 27일
사망1751년 7월 12일 (향년 66세)
개명마쓰다이라 요리히사 (松平頼久) → 요리마사 (頼方) → 도쿠가와 요시무네 (徳川吉宗)
별칭쌀 쇼군, 88 쇼군, 야기 쇼군
묘소도에이 산 간에이 사 엔돈인
가문기슈 도쿠가와 가문 → 가쓰노 마쓰다이라 가문 → 기슈 도쿠가와 가문 → 도쿠가와 쇼군 가문
관직
관위종4위하 → 우근위권소장 겸 주세료 → 종3위 → 좌근위권중장 → 참의 → 권중납언 → 정2위 → 내대신 겸 우근위대장 → 우대신 → 증정1위 → 태정대신
막부에도 막부 제8대 정 이대장군 (1716년 8월 13일 ~ 1745년 9월 25일)
에치젠가쓰노 번 번주 → 기이와카야마 번 번주
가족 관계
아버지도쿠가와 미쓰사다
어머니조엔인
양아버지도쿠가와 요리모토, 도쿠가와 이에쓰구
형제자매도쿠가와 쓰나노리, 지로키치, 도쿠가와 요리모토, 에이히메 (우에스기 쓰나노리 정실), 미쓰히메 (이치조 후유쓰네 부인), 이쿠히메 (사타케 요시미네 정실), 쓰나히메
정실마사코 여왕
측실신도쿠인, 신신인, 혼토쿠인, 가쿠주인, 오사메, 오사키, 기타
자녀도쿠가와 이에시게, 남자, 무네타케, 겐조, 무네타다, 요시히메
양자무네나오, 다케히메, 도네히메
양자 (후견인)손인 입도 친왕
기타 정보
유년명겐로쿠
통칭신노스케
계명유토쿠인덴 증정1위 대상국 (有徳院殿贈正一位大相国)

2. 생애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역대 쇼군의 직계 아들이 아닌, 도쿠가와 씨의 분가 출신이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창시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과거 미나모토 씨의 혈통이 단절된 사례를 교훈 삼아, 자신의 직계 후손이 끊어져 가문이 단절될 위험에 대비하고자 했다. 이에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2대 쇼군이 된 후, 다른 세 아들을 통해 고산케를 창설했다. 고산케는 쇼군 가문에 남자 후계자가 없을 경우 쇼군을 배출하기 위한 세습 가문으로, 오와리 번, 기이 번, 미토 번이 이에 해당했다.

요시무네는 이 중 기이 가문 출신이다. 기이 가문의 시조는 이에야스의 아들 중 한 명인 도쿠가와 요리노부이며, 이후 그의 아들 도쿠가와 미쓰사다가 뒤를 이었다. 요시무네는 미쓰사다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형들의 요절 후 1705년 기이의 다이묘가 되었다. 그는 이후 쇼군 자리에 오르게 된다.

요시무네는 쇼군 가문과 혈연적으로 가까운 관계였다. 그의 할아버지 도쿠가와 요리노부는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동생이었고, 아버지 도쿠가와 미쓰사다는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와 사촌 지간이었다. 따라서 요시무네는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와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두 사람은 형제), 그리고 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아버지인 도쿠가와 쓰나시게와도 사촌 관계에 해당한다.

2. 1. 유년기

조쿄 원년(1684년) 음력 10월 21일, 기슈번 번주 도쿠가와 미쓰사다의 넷째 아들로 성 아래 후키아게 저택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고세 도시키요의 딸 조엔인(오유리노 가타)이었다. 와카야마성의 오오쿠에서 목욕 시중을 들던 아야코는 미쓰사다의 눈에 들어 요시무네를 낳았다고 전해진다.[7] 아명은 '''겐로쿠'''(源六)였다.

어머니의 신분이 낮았기 때문에[1], 요시무네는 어린 시절 가로 가노 마사나오의 집에서 자랐다. 당시 아버지가 "마흔둘에 낳은 아이"는 건강하게 자라지 못한다는 미신이 있어, 성 안 소나무 옆에 잠시 버려졌다가 마사나오가 줍는 형식을 취했다고 한다.[8] 가노 가문에서 '기저귀'라는 유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5살까지 지냈다. 둘째 형 지로키치가 병사한 후에는 이름을 '''신노스케'''(新之助)로 바꾸고 에도의 기슈번 저택으로 옮겨 살았다. 어릴 적에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말썽이 심했다고 한다.

겐로쿠 10년(1697년), 14세 때 관례를 치렀다. 로주 오쿠보 다다토모의 주선으로 당시 쇼군이던 도쿠가와 쓰나요시를 알현하고, 에치젠국 뉴 군(丹生郡)에 고쿠다카 3만 석의 영지를 하사받았다.[1] 그러나 실제로 영지를 다스린 것은 가신들이었고, 신노스케(요시무네)는 계속해서 기슈 와카야마성에서 지냈다.

2. 2. 기슈 번주 시절

겐로쿠 9년(1696년) 말, 13세의 나이에 종4위하 우근위권소장 겸 주세두(主税頭)에 임명되어 '''마쓰다이라 요리히사'''(松平頼久)라고 칭했다. 같은 시기 형 요리모토 역시 종4위하 좌근위권소장 겸 내장두(内蔵頭)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겐로쿠 10년(1697년) 4월,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를 알현하고 에치젠국 니우군 내 3만 을 받아 가즈라노 번주가 되었다. 이때 이름을 요리히사에서 '''마쓰다이라 요리카타'''(松平頼方)로 바꾸었다. 형 요리모토도 같은 날 에치젠국 니우군 내 3만 석을 받아 다카모리 번주가 되었다. 요리카타는 형들과 달리 다음 방에서 대기하고 있었으나, 노중 오쿠보 타다토모의 배려로 쓰나요시를 알현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형 요리모토와 관위 서임, 영지 규모가 동일했기에 차별받았다는 이야기는 신빙성이 낮다. 요리카타는 실제 가즈라노 번으로 가지 않고 와카야마성 아래에 머물렀으며, 번 통치는 기슈 번에서 파견된 가신들이 대행했다. 이 영지는 "기이령"이라 불렸고, 파견된 가신들도 독립된 번사가 아닌 기슈 번사 신분이었다.

호에이 2년(1705년), 21세 때 맏형이자 3대 기슈 번주인 쓰나노리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둘째 형 요리모토가 4대 번주가 되었다. 요리모토가 영유하던 다카모리 번은 막부에 반납되었고, 그중 1만 석이 요리카타의 가즈라노 번에 더해져 4만 석이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아버지 미쓰사다와 형 요리모토마저 반년 사이에 연달아 사망하면서, 요리카타는 22세의 나이로 기슈 도쿠가와가를 상속하여 5대 번주로 취임했다.[33] 이때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로부터 편휘(이름 한 글자)를 받아 비로소 '''도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로 개명하였다. 기슈 번 상속 시 가즈라노 번 영지는 막부에 반납되어 고료(막부 직할령)가 되었다.

호에이 3년(1706년), 황족인 2품 사다치 친왕의 딸 마사코 여왕(真宮理子女王)을 정실로 맞이했으나, 호에이 7년(1710년)에 사별하였다.

기슈 번은 기이 국에 위치하며 50만 이 넘는 부유한 지역이었지만, 요시무네가 번주가 되었을 때는 아버지와 할아버지 대부터 막부에 진 빚과 두 형 및 아버지의 장례 비용, 번찰(번에서 발행한 화폐) 정지 등으로 재정이 매우 악화된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1707년에는 호에이 지진과 쓰나미가 기이 국 해안 지역을 덮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1]

호에이 7년(1710년) 4월, 기슈에 입성한 요시무네는 악화된 번 재정을 개선하기 위해 대대적인 번정 개혁에 착수했다. 스스로 무명옷을 입고 식사를 간소하게 하는 등 솔선수범하여 검소 절약을 강조했으며, 통치 기구를 간소화하고 가신들에게 상납금을 부과하는 등 강력한 재정 긴축 정책을 펼쳤다. 또한 와카야마 성 오테몬(大手門) 앞에 소원 상자(訴訟箱)를 설치하여 백성들의 의견을 직접 듣고, 문무를 장려하며 효행을 포상하는 등 민심을 살피고 풍속을 바로잡는 데도 힘썼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번의 재정은 상당 부분 개선되었다.

1712년 쇼군 이에노부가 사망하고 어린 아들 이에쓰구가 쇼군이 되었다. 요시무네는 에도아라이 하쿠세키와 같은 보수적인 유교 학자들에게 의존하기보다 독자적으로 기슈 번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개혁을 진행하던 중, 1716년 초 쇼군 이에쓰구가 후사 없이 7세의 나이로 요절하면서 바쿠후는 분가 중에서 다음 쇼군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1]

기슈 번주 시절 측실 신토쿠인에게서 장남 나가토미마루(長福丸, 훗날의 쇼군 이에시게)를, 혼토쿠인에게서 차남 고지로(小次郎, 훗날의 다야스 무네타케)를 얻었다.

2. 3. 쇼군 취임

교호 원년(1716년), 7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구가 8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로부터 이어져 온 쇼군 가문의 직계 남성 후계자 혈통(히데타다의 남계)이 끊어졌다. 이에 따라 쇼군 계승권을 가진 고산케(御三家)의 당주들 중에서, 기슈(紀州) 번주였던 요시무네가 방계 가문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쇼군직을 계승하게 되었다.

요시무네의 쇼군 취임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당시 히데타다의 증손자이자 다테바야시 번의 번주인 마쓰다이라 기요타케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남계 자손이 존재하여 히데타다의 혈통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었다.[34] 그러나 기요타케는 다테바야시 번에서 과중한 세금 징수로 인해 잇키(一揆, 농민 봉기)가 자주 발생하는 등 통치가 불안정했고, 번주로서의 평판이 좋지 않았다. 또한 타 가문에 양자로 들어간 신분이었으며 이미 고령이었고 남자 후계자도 없었기 때문에 쇼군 후보에서 제외되었다.[34] 기요타케 본인도 쇼군직에 큰 야심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쇼군 계승 서열상으로는 고산케 필두로 여겨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9남 도쿠가와 요시나오를 시조로 하는 오와리 가문이 이에야스의 10남 도쿠가와 요리노부를 시조로 하는 요시무네의 기슈 도쿠가와 가문보다 앞섰다. 오와리 가문에서는 쇼토쿠 3년(1713년)경 당주인 4대 번주 도쿠가와 요시미치와 그의 아들인 5대 번주 도쿠가와 고로타가 잇따라 사망하는 불운을 겪어 요시미치의 이복동생인 쓰구토모가 6대 번주가 되었다. 쓰구토모는 황실과도 연관이 깊었고(고노에 이에히로의 딸 고운인과 약혼), 마노베 아키후사와 아라이 하쿠세키 등의 지지를 받아 유력한 쇼군 후보로 부상했다.

결정적으로 요시무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세대적으로 더 가깝다는 명분을 내세웠고, 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정실 덴에이인과 이에쓰구의 생모 겟코인을 비롯한 오오쿠(大奥, 쇼군의 처첩과 시녀들의 거처)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또한 마노베 아키후사와 아라이 하쿠세키에 반대하는 막신(幕臣)들의 지지까지 확보하면서 결국 교호 원년(1716년)에 제8대 쇼군으로 취임했다.[2] 일각에서는 이러한 배경 때문에 요시무네의 쇼군 취임 과정에 덴에이인과 겟코인 사이의 정치적 암투가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쇼군으로 취임하면서 요시무네는 이전 쇼군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다테바야시 번이나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고후 번은 당주가 쇼군 후계자가 되어 에도성으로 들어가면 폐번(廢藩)되고 가신들은 막신으로 편입되었던 전례가 있었다. 그러나 요시무네는 고산케의 영지는 도쇼 신군(東照神君, 이에야스)에게서 하사받은 성지(聖地)라 하여, 자신의 사촌인 도쿠가와 무네나오에게 가독을 물려주어 기슈 번을 존속시켰다. 또한 기슈 번사 중에서 가노 히사미치, 아리마 시린 등 높은 녹봉(大禄)을 받는 중신이 아닌 40여 명을 선발하여 자신의 측근으로 삼아 에도성에 입성했다. 이들은 요시무네가 특별히 엄선한 인물들이 아니라, 마침 그날 당번이었던 이들을 그대로 데려온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러한 조치는 기존의 측근 정치에 불만을 품고 있던 후다이 다이묘하타모토들에게 호감을 얻는 효과를 가져왔다.

2. 4. 교호 개혁

8대 쇼군으로 취임한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우선 제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 시대부터 권력을 누려온 소바요닌 마나베 아키후사와 학자 아라이 하쿠세키를 파면하였다.[2] 이를 통해 이전까지의 소바요닌 중심 정치에서 벗어나 쇼군이 직접 정치를 주도하는 친정(親政)을 확립하려 했으나, 실제로는 '측근 어용 취급'이라는 새로운 직책을 만들어 사실상 측근 정치를 지속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요시무네는 기슈 번주 시절 번 통치 경험을 살려 미즈노 다다유키를 로주로 임명하고 본격적인 개혁 정치에 착수했다. 이 개혁은 교호 개혁이라 불리며, 에도 시대 3대 개혁 중 하나로 꼽힌다.

교호 개혁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정치 및 사상: 이전 시대의 문치(文治) 중심에서 벗어나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와 같은 무단(武斷) 정치를 강조했다. 검소와 검약을 중시하며 무사들의 기강 확립과 풍속 개선을 촉구하고, 쇠퇴하던 무예를 장려했다.
  • 재정 및 경제: 막부 재정 안정을 위해 조세 제도를 개혁하여 정면법과 상미령 등을 시행했다. 신전 개발을 통해 토지 개발을 장려하고, 아시다카 제도(족고의 제)를 도입하여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과 함께 관료 제도를 개선하고 지출을 줄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오카 타다스케가 등용되었다. 또한, 오오쿠의 인원을 약 4,000명에서 1,300명까지 대폭 감축하여 재정 부담을 덜었다.
  • 사법 및 행정: 소송 기간을 단축하고 공사방어정서를 제정하여 사법 제도를 정비했다. 에도에 거리 소방서를 설치하여 화재 예방 및 대응 체계를 마련했다. 메야스바코(직소 상자)를 설치하여 백성들의 의견과 불만을 직접 듣고 정치에 반영하고자 했다.
  • 사회 및 문화: 고이시카와 양생소를 설치하여 서민들을 위한 의료 정책을 개선했다. 1640년부터 엄격히 금지되었던 서양 서적 수입 제한을 1720년에 완화하여 네덜란드를 통한 학문 연구, 즉 란가쿠 발전의 계기를 마련했다.[4] 이는 천문학자이자 철학자인 니시카와 조켄의 영향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4] 또한, 일본 고유의 일본도 제작 기술 쇠퇴를 우려하여 1721년 칼 장인 대회를 개최하고, 전국의 명검 목록인 ''교호 메이부츠초''(享保名物帳) 편찬을 명령하는 등 전통문화 보존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 후계 구도 안정: 고산케를 보완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들로 고산쿄 (다야스, 히토츠바시, 시미즈 가문)를 창설했다. 이들은 영지를 직접 다스리지는 않았지만, 이후 쇼군 계승 문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요시무네의 쇼군 재임 기간은 30년에 달했으며,[2] 그의 교호 개혁은 에도 3대 개혁 중 가장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3] 이러한 개혁이 없었다면 막부의 재정 악화로 인한 체제 붕괴가 더 빨랐을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개혁의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존재했다. '오공 오민'(五公五民, 수확량의 50%를 세금으로 납부)으로 대표되는 과도한 세금 증가는 농민들의 삶을 극도로 궁핍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요시무네 통치 말기에는 전국 각지에서 잇키(백성 반란)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또한 막부뿐 아니라 서민에게까지 검약을 강요하면서 사회 전반의 활력이 떨어지고 경제와 문화가 정체되는 부작용도 나타났다.

2. 5. 오고쇼 시절

엔쿄 2년(1745년) 9월 25일, 쇼군직을 장남 이에시게에게 물려주고 오고쇼로 물러났다. 오고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아들 히데타다에게 쇼군직을 물려준 뒤 사용했던 칭호이며, 히데타다 역시 은퇴 후 같은 칭호를 사용했다.[5]

이에시게는 언어 장애가 심하고 병약하여, 총명한 차남 무네타케나 4남 무네타다를 쇼군으로 세우자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요시무네는 형제 간의 후계자 다툼을 우려했고, 이에시게의 아들인 이에하루에게 기대를 걸어 장자인 이에시게를 후계자로 선택했다. 일설에는 이에시게가 언어 장애는 있었으나 지능은 정상이었고 정무 수행 능력도 있었다고도 한다. 또한, 요시무네가 오고쇼로서 실권을 계속 쥐기 위해 일부러 이에시게를 선택했다는 설도 있으나 정설은 아니다. 결국 이에시게가 정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요시무네는 사망할 때까지 막부의 실권을 계속 장악했다.

요시무네는 차남 무네타케와 사남 무네타다를 다른 도쿠가와 분가에 양자로 보내거나 영지를 주어 분가시키는 관례를 따르지 않았다. 대신 에도 성 안에서 봉급을 받으며 각각 별가(別家)를 이루도록 했다. 이에 따라 무네타케가 다야스 가문을, 무네타다가 히토쓰바시 가문을 열었다. 요시무네 사후에는 이에시게의 차남 시게요시를 시조로 하는 시미즈 가문이 더해져 이 세 가문을 고산쿄라 부르게 되었다. 이후 쇼군 이에시게의 직계는 10대 쇼군 이에하루에서 끊겼으나, 히토쓰바시 가문에서 11대 쇼군 이에나리가 나오는 등, 요시무네의 혈통은 14대 쇼군 이에모치까지 이어졌다.

쇼군직에서 물러난 다음 해인 엔쿄 3년(1746년), 요시무네는 중풍을 앓아 오른쪽 반신 마비와 언어 장애 후유증을 겪었다.[14][15] 측근이었던 오가사와라 마사토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 통신사가 방문했을 때 오가사와라의 건의로 에도 성에 경사로와 가로목이 달린 계단(일종의 배리어 프리 시설)인 '다라다라바시'를 만들어 통신사가 선보인 곡마를 관람했다고 한다.[14] 요시무네는 오가사와라와 함께 재활 치료에 힘써 에도 성 니시노마루에서 혼마루까지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하기도 했다.[14]

쇼군 은퇴 6년 뒤인 간엔 4년(1751년) 6월 20일에 사망했다. 향년 68세(만 66세). 사인은 재발한 뇌졸중이라고 한다.[15] 사후 태정대신으로 추증되었으며, 법명은 유토쿠인(有徳院)이다. 묘소는 도쿄도 다이토구에 있는 간에이 사이다. 혈액형은 도쿠가와 이에쓰나와 같은 O형이었다고 전해진다.

3. 가계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역대 쇼군의 직계 아들이 아니었으며, 도쿠가와 씨의 분가 출신이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창시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미나모토 씨의 혈통이 끊어진 역사적 사실을 인지하고, 자신의 직계 후손이 단절될 경우 도쿠가와 가문이 멸족될 위험을 우려했다. 이에 따라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2대 쇼군이 되었지만, 다른 세 아들을 통해 고산케를 설립했다. 고산케는 쇼군에게 남자 후계자가 없을 경우 쇼군을 배출할 수 있는 세습 가문으로, 오와리 번, 기이 번, 미토 번의 세 가문이었다.

요시무네는 이 중 기이 가문 출신이다. 기이 가문의 시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인 도쿠가와 요리노부이며, 이에야스는 그를 기이의 다이묘로 임명했다. 요리노부의 아들 도쿠가와 미쓰사다가 뒤를 이었고, 미쓰사다의 두 아들이 차례로 번주 자리를 계승한 후 사망하자, 1705년 미쓰사다의 넷째 아들인 요시무네가 기이 번의 다이묘가 되었다. 이후 그는 쇼군 자리에 오르게 된다.

요시무네는 도쿠가와 쇼군 가문과 가까운 혈연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인 도쿠가와 요리노부는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형제였고, 아버지 도쿠가와 미쓰사다는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사촌이었다. 따라서 요시무네는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와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 형제와는 6촌 관계이며, 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아버지인 도쿠가와 쓰나시게와도 6촌 관계였다.


  • 아버지: 도쿠가와 미쓰사다
  • 어머니: 오유리노 카타 (お由利の方, 1655–1726), 후의 조에닌(浄円院)


'''이복 형제'''

'''부인 및 자녀'''

구분이름 (법명/원칭)생몰년자녀비고
정실후시미노미야 마사코 여왕(理子女王)
(간토쿠인, 寛徳院)
1691–1710-후시미노미야 사다유키 친왕의 딸
측실오스마노 카타(お須磨の方)
(신토쿠인, 深徳院)
1688–1713장남 도쿠가와 이에시게 (9대 쇼군)오쿠보 타다나오의 딸
측실오콘노 카타(お吉牟の方)
(혼토쿠인, 本徳院)
1696–1723차남 도쿠가와 무네타케 (다야스 가문 시조)다케모토 마사나가(竹本正長)의 딸
측실오우메노 카타(お梅の方)
(신신인, 深心院)
1700–1721삼남 겐조(源三, 1719-1720)
사남 도쿠가와 무네타다 (히토쓰바시 가문 시조)
타니구치 마사쓰구(谷口正次)의 딸
측실오쿠메노 카타(お久免の方)
(가쿠주인, 覚樹院)
1697–1777장녀 요시히메(芳姫, 1721–1722, 쇼운인(正雲院))이나바 쓰네미치(稲葉常 rechte)의 딸
측실오사메노 카타(おさめの方)
(리쇼인, 理性院)
?-
측실오사키노 카타(お咲の方)?-


  • 생모 불명의 자녀: 차남 (요절 추정)
  • 사생아: 텐이치(天一) (어머니는 시라뵤시(白拍子); 요시무네 재위 기간 중 사형)


'''양자 및 양녀'''

  • 도쿠가와 무네나오: 요시무네의 재종형(할아버지 요리노부의 형제인 마쓰다이라 요리시게의 손자). 이요 사이조 번 2대 번주에서 기슈 번 6대 번주가 됨.
  • 다케히메(浄岸院, 1705–1772): 세이칸지 히로사다(清閑寺熙定)의 딸.[30] 원래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양녀였으며, 아이즈 번 후계자 마쓰다이라 마사카타(松平正容)의 아들 마사쿠니(正邦)와 약혼했으나 파혼, 이후 아리스가와노미야 요리히토 친왕(有栖川宮頼仁親王)과 약혼했으나 파혼, 최종적으로 사쓰마 번 번주 시마즈 쓰구토요와 결혼함. 딸 기쿠히메(菊姫)를 낳음.
  • 토네히메(利根姫, 운쇼인(雲松院)): 센다이 번 번주 다테 무네무라와 결혼. 실제로는 양자 도쿠가와 무네나오의 딸.


'''유자(猶子)'''

  • 손인 법친왕: 레이겐 천황의 제18황자. 요시무네의 유자(명목상의 아들)가 됨.

4. 정책 및 신념

1716년 쇼군으로 취임한 요시무네는[2] 이전 시대의 소바요닌(側用人) 중심 정치를 벗어나 쇼군이 직접 통치하는 친정(親政) 체제를 확립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마나베 아키후사, 아라이 하쿠세키 등을 파면하고 미즈노 다다유키를 로주(老中)로 등용하여 교호 개혁(享保改革)을 추진하였다. 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의 무단 정치(武斷政治)를 이상으로 삼고 검약을 강조하며 무사들의 기강 확립에 힘썼다.

교호 개혁은 막부 재정 안정과 사회 기강 확립을 목표로 조세 제도 개혁, 행정 및 사법 제도 정비, 사회 복지 정책 개선 등 다방면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 개혁은 에도 막부 3대 개혁 중 가장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받으며, 막부의 재정 건전성을 회복하고 통치 기반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3] 그러나 한편으로는 세율 인상으로 농민 부담이 커져 요시무네 통치 말기에는 잇키(一揆)가 빈번하게 발생하기도 했다.

요시무네는 쇼군가의 후계 안정을 위해 기존의 고산케를 보완(또는 대체)할 목적으로 자신의 아들들을 시조로 하는 고산쿄를 창설했다. 이들은 영지를 직접 다스리지는 않았으나, 막부 말기까지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실제로 히토츠바시 가문에서 쇼군이 배출되기도 했다.

문화 및 학술 분야에서도 그의 정책과 관심이 두드러졌다. 그는 에도 시대 초부터 쇠퇴하던 일본의 제작 전통을 되살리고자 1721년 전국의 장인들을 모아 다이묘 영지에서 대회를 열었으며, 전국의 명검 목록인 『교호 메이부츠초』(享保名物帳) 편찬을 명령했다. 또한, 1720년 기독교 관련 서적을 제외한 외국 서적의 수입 제한을 완화하여 실용적인 서양 학문, 즉 란가쿠(蘭學)가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4] 이는 천문학자이자 철학자인 니시카와 조켄의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4] 중국 의학 서적인 태평혜민화제국방(太平恵民和剤局方)의 공식적인 검토나 승인도 이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요시무네는 개인적으로도 호기심이 강하고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다. 교호 13년(1728년)에는 베트남에서 코끼리를 직접 주문하여 나가사키에서 에도까지 육로로 운반하게 하여 큰 화제를 모았다.[16][17] 건강 관리를 위해 세키구치 쥬신 유파의 권법(유술)으로 몸을 단련하고 매사냥으로 운동 부족을 해소했으며,[18] 공무 외 시간에는 그림 감상과 모사를 즐겼다. 가노 쓰네노부와 가노 고신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엷은 먹을 사용하는 '번짐 매' 기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송·원 시대의 중국화를 애호하여 다이묘 가문에 소장된 목계의 소상팔경도를 빌려 감상하고, 중국 화가 심남빈을 초빙하기도 했다. 또한 『연희식』에 기록된 고대 염색법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18]

30년이라는 긴 재임 기간 동안[2] 요시무네는 강력한 리더십과 실용적인 정책을 통해 막부 중흥기를 이끌었으며, 후대 쇼군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업적 덕분에 그는 도쿠가와 쇼군 중 최고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3]

4. 1. 통치 방침

8대 쇼군으로 취임한 직후, 6대 쇼군 이에노부 시대부터 권력을 장악해 온 소바요닌(側用人) 마나베 아키후사와 학자 관료 아라이 하쿠세키 등을 파면하였다. 이를 통해 이전까지 이어져 온 소바요닌 중심의 정치를 끝내고 쇼군이 직접 통치하는 친정(親政) 체제를 확립하고자 했다. 이후 미즈노 다다유키를 로주(老中)로 등용하여, 자신이 기슈 번주 시절 추진했던 재정 개혁을 모델로 삼아 교호 개혁(享保改革)이라 불리는 대대적인 개혁 정치를 시작했다. 이는 에도 막부의 3대 개혁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요시무네는 학문과 교양을 중시했던 이전 시대의 문치(文治) 정치에서 벗어나, 막부의 창설자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로 돌아가 무(武)를 숭상하는 무단(武斷) 정치를 지향했다. 그는 검소와 검약을 강조하며 무사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풍속을 개선하는 데 힘썼다.
교호 개혁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재정 및 경제: 악화된 막부 재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조세 제도를 개혁했다. 일정 기간 동안 세율을 고정하는 정면법(定免法)을 도입하고, 다이묘들에게 일정량의 쌀을 상납하게 하는 상미령(上米令)을 시행했다. 또한 새로운 농지 개간(新田開発)을 장려하여 생산력을 높이고자 했다.
  • 행정 및 인사: 능력 있는 하급 관료도 고위직에 오를 수 있도록 봉급을 조정해주는 아시다카 제도(足高の制)를 도입하여 관료 제도를 개선하고 지출을 줄였다.
  • 사법: 소송 절차를 간소화하고 처리 기간을 단축하여 신속한 판결이 이루어지도록 사법 제도를 개혁했다.
  • 사회 및 복지: 빈번했던 에도의 화재에 대비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 쇼군의 거처인 오오쿠(大奥)의 규모와 지출을 줄여 재정을 정비했다. 백성들의 의견과 불만을 직접 듣기 위해 目安箱|메야스바코일본어(직소 상자)를 설치했으며, 서민들을 위한 고이시카와 요양소(小石川養生所)를 설립하여 의료 정책을 개선했다.
  • 문화 및 학술: 기독교와 관련 없는 실용적인 서양 서적의 수입 제한을 완화하여 새로운 지식과 기술의 도입을 장려했다.


교호 개혁은 에도 3대 개혁 중 가장 성공적인 개혁으로 평가받으며, 막부의 재정 건전성을 회복하고 통치 기반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개혁이 없었다면 재정 파탄으로 인한 막부의 붕괴가 더 빨랐을 것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공 오민'(五公五民, 수확량의 절반을 세금으로 거둠)이라는 말로 대표되듯 세금 부담이 크게 늘어나면서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로 인해 요시무네 통치 말기에는 일본 각지에서 농민 봉기인 잇키(一揆)가 자주 발생하기도 하였다.

요시무네는 아라이 하쿠세키가 주도했던 쇼토쿠의 치(正徳の治) 정책 중 상당수를 폐지했지만, 합리적이라고 판단되는 정책은 유지하는 실용적인 면모를 보였다. 일설에는 요시무네가 하쿠세키의 저서를 폐기하는 등 학문적으로 탄압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는 막부 창설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를 존경했으며, 특히 쓰나요시가 제정한 생류 연애령(生類憐れみの令)을 즉시 폐지한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조치를 비판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쓰나요시 시대에 금지되었던 개쫓이(犬追物)나 매사냥을 부활시키는 등, 특정 인물의 정책을 무조건 따르지는 않았다. 또한 치수, 간척, 시가지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아스카야마 공원(飛鳥山公園)이나 스미다 강 제방 등에 벚나무를 심어 공공 공간을 조성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4. 2. 검약

기슈 번주 시절부터 요시무네는 스스로 무명옷을 입고 간소한 식사를 하는 등 절약에 앞장섰다.[33] 이는 당시 악화된 번의 재정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쇼군으로 취임한 후에는 교호 개혁을 통해 검소와 검약을 더욱 강조하였다. 문치(文治)보다는 무단(武斷) 중심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며, 특히 무사들의 사치스러운 풍속 개선을 중요하게 여겼다. 요시무네가 실천한 구체적인 검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속옷은 목면으로 된 것만 입도록 정하고, 다른 재질의 속옷은 착용하지 않았다. 매사냥을 할 때 입는 겉옷과 바지 역시 목면으로 만들었다.[19]
  • 평소 식사는 국 하나와 반찬 하나(1즙 1채)로 매우 간소하게 차렸으며, 식사 횟수도 하루에 아침과 저녁, 두 끼를 원칙으로 삼았다.[19]


하지만 이러한 검약 기조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쇼군으로 지명하는 데 기여한 덴에이인(天英院)에게는 연간 1만 2천 량이라는 상당한 액수의 보수를 지급했다. 또한, 7대 쇼군 이에쓰구의 생모인 겟코인(月光院)에게도 후키아게 어전(吹上御殿)이라는 거처를 마련해주고 연간 1만 량에 달하는 보수를 지급하는 등, 오오쿠(大奥) 상층부의 경비 삭감에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19]

4. 3. 경제

기슈 번주 시절, 요시무네는 악화된 번의 재정을 개선하기 위해 대대적인 번정(藩政) 개혁에 착수했다. 스스로 무명옷을 입고 검약을 실천하며 통치 기구를 간소화하는 등의 노력으로 상당한 재정 개선을 이루었다.[33] 이러한 경험은 훗날 쇼군으로서 교호 개혁을 추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쇼군으로 취임한 요시무네는 아라이 하쿠세키 등 이전 시대의 소바요닌 중심 정치를 벗어나 쇼군 친정(親政) 체제를 확립하고, 미즈노 다다유키를 로주로 등용하여 본격적인 개혁에 나섰다. 그의 경제 정책은 교호 개혁으로 알려져 있으며, 에도 막부의 재정 건전화를 목표로 했다.

주요 경제 정책은 다음과 같다.

  • 재정 긴축 및 조세 제도 개혁: 검약을 강조하고 무사들의 풍속 개선을 독려했다. 또한 정면법(定免法)과 상미령(上米令)을 시행하여 조세 제도를 개혁하고 막부의 재정을 안정시키고자 했다.[2] 이는 막부 재정에 기여했지만, '오공 오민'(五公五民, 수확량의 절반을 세금으로 바침)으로 대표되는 세율 인상은 농민들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 신전 개발 및 농업 장려: 신전 개발을 적극 장려하여 경작지를 늘리고 쌀 생산량을 증대시키려 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요시무네는 '쌀 장군'(米将軍)이라는 별명을 얻었다.[2] 또한 상품 작물 재배를 권장하여 사탕수수 재배를 시도했고, 이는 훗날 일본 최초의 국산 설탕인 와산본(和三盆)의 상품화로 이어졌다. 기근 대비를 위해 구황 작물인 고구마 재배도 전국적으로 장려했다.
  • 화폐 개주: 아라이 하쿠세키가 추진했던 쇼토쿠 금은(正徳金銀)의 통용 정책을 이어받아 초기에는 강력하게 추진했으나[25], 쌀값 하락으로 인한 무사와 농민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오카 타다스케의 건의를 받아들여 화폐 가치를 낮추는 겐분 개주(元文の改鋳)를 단행했다.[26][27] 이 개주는 통화 공급량을 늘려 일본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약 80년간 화폐 제도의 안정을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는다.[28]
  • 관료 제도 개혁: 아시다카 제도(足高の制)를 도입하여 능력 있는 하급 관료를 등용하고 지출을 줄이는 등 관료 제도를 개선했다.


요시무네는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했다. 오와리 번주 도쿠가와 무네하루는 요시무네와 다른 독자적인 경제 정책을 펼치며 대립했는데, 결국 막부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은거와 폐문 처분을 받았다.[20][22] 또한 화려한 유흥으로 알려진 사카키바라 마사미네를 처벌하는 등[24], 막부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교호 개혁에도 막부의 3대 개혁 중 가장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받으며, 막부 재정을 일시적으로 회복시키고 막부의 붕괴를 늦추는 데 기여했다.[3] 이 개혁은 이후 간세이 개혁덴포 개혁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증세를 통한 재정 확보는 농민들의 반발을 사 요시무네 말기에는 잇키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이러한 증세 정책은 후대 개혁에서는 계승되기 어려워 결국 실패의 한 요인이 되었다.

4. 4. 보안

요시무네는 포경과 깊은 관련이 있었으며, 이를 해상 보안 강화에 활용했다. 기슈 번주 시절인 1702년1710년에는 구마노나다의 고래잡이 조직에게 군사 훈련을 겸한 대규모 포경을 실시하게 하고 직접 참관하기도 했다. 또한 구마노나다의 고래 관측소에서 와카야마성까지 봉화를 이용한 해상 보안 연락망을 구축했다.

쇼군 취임 이후에는 하천 범람 시 피해자 구출이나 에도만으로 흘러 들어간 하천 화물 및 쓰레기 회수에 고래 배(고식 포경선)를 활용했다. 이를 위해 '고래 배 시위 어용'이라는 직책을 신설하여 해상에서의 구조 및 정리 작업을 담당하도록 했다.

해안 방어 정책으로는 기존의 대선 건조 금지 정책을 유지하면서도, 에도만 입구인 우라가 항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봉행소를 이전하고 선박 검사 제도를 강화하는 등 경계를 철저히 했다.

내부적으로는 쇼군 직속 첩보 및 감찰 조직인 오니와반을 처음으로 창설하여 각 번의 동향을 살피고 반역자를 단속하는 등 막부의 통치력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5. 대중 매체


  • '''소설'''
  • * 마츠모토 세이초, 《난등 에도 그림자 놀이》 (1985년, 카도카와 쇼텐)
  • * 츠모토 요, 《오와란지의 남자》 (1994년 - 1995년, 닛케이 신문사)
  • * 마나베 아키토, 《만약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총리가 된다면》 (2021년, 선마크 출판)

  • '''텔레비전 드라마'''
  • * 칸사이 TV 《오오쿠》 (1968년 - 1969년, 배우: 마츠카타 히로키)
  • * 칸사이 TV 《도쿠가와 여자 그림 두루마리》 (1970년, 배우: 타카하시 마사야)
  • * NHK 《남자는 배짱》 (1970년 - 1971년, 배우: 하마하타 켄키치)
  • * TBS 《오오카 에치젠》 (1970년 - 1999년·2006년, 배우: 야마구치 타카시)
  • * TV 아사히 《폭풍을 부르는 장군》 (1978년 - 2003년·2004년·2008년, 배우: 마츠다이라 켄)
  • * 칸사이 TV 《오오쿠》 (1983년, 배우: 시카가 타케시)
  • * 후지 TV 《암살자의 신화》 (1984년, 배우: 나카노 세이야)
  • * TV 도쿄 신춘 와이드 시대극 《도쿠가와 풍운록 어삼가의 야망》 (1986년, 배우: 키타오지 킨야)
  • * NHK 대하 드라마 《8대 쇼군 요시무네》 (1995년, 배우: 니시다 토시유키, 아역: 아오야기 쇼→오노에 마츠야→사카모토 히로유키)
  • * TV 도쿄 신춘 와이드 시대극 《불꽃 봉행 오오카 에치젠노카미》 (1997년, 배우: 와타나베 토루)
  • * TBS 내셔널 극장 《미토 코몬》
  • ** 제28부 (2000년, 배우: 모야마 잇페이. 청년 시대의 요시무네가 등장)
  • ** 제38부 (2008년, 배우: 야나기사와 타이 스케. 어린 시절(겐로쿠)의 요시무네가 등장)
  • * TV 도쿄 신춘 와이드 시대극 《도쿠가와 풍운록 8대 쇼군 요시무네》 (2008년, 배우: 우치다 아사히나카무라 마사토시)
  • * NHK BS 프리미엄 BS 시대극 《오오카 에치젠》 (2013년 - 2022년, 배우: 타이라 타케히로→시이나 킷페이)
  • * BS 아사히 4K 대형 시대극 스페셜 《기슈 번주 도쿠가와 요시무네》 (2019년, 배우: 야마모토 코지)
  • * 후지 TV 《오오쿠 최종장》 (2019년, 배우: 오오사와 타카오)
  • * NHK 드라마 10 《오오쿠》 (2023년, 배우: 토미나가 아이) ※남녀 역전 설정
  • * 후지 TV 목요 극장 《오오쿠》 (2024년, 배우: 이부 마사토)

  • '''파치슬로'''
  • * 다이토 기켄 《요시무네》 (2006년 - )

  • '''라쿠고'''
  • * 기슈

  • '''무대'''
  • * 《별이 지는 밤》 (2015년, 배우: 에이마 나오키)

참조

[1] 서적 Early Modern Japa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5-08-00
[2]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1834
[3] 서적 Secret Memoirs of the Shoguns: Isaac Titsingh and Japan, 1779–1822 2006
[4] 서적 The Invention of Religion in Japan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5] 문서
[6] 웹사이트 Genealogy https://reichsarchiv[...] 2018-07-04
[7] 서적 江戸時代を観る リバティ書房 1994
[8] 문서 豊臣秀頼
[9] 문서 会津松平家
[10] 문서 紀州藩
[11] 문서 桜町天皇
[12] 문서 徳川実紀
[13] 서적 将軍と側近 室鳩巣の手紙を読む 新潮社 2014-12-20
[14] 서적 吉宗公 御一代記
[15] 서적 徳川将軍家十五代のカルテ 新潮新書 2005-05-00
[16] 서적 像志 1729
[17] 서적 象の旅長崎から江戸へ 1992
[18] 서적 歴史をつくった人びとの健康法―生涯現役をつらぬく― 中央労働災害防止協会 2002
[19] 서적 歴史をつくった人びとの健康法―生涯現役をつらぬく― 中央労働災害防止協会 2002
[20] 문서 継友
[21] 문서 徳川実紀
[22] 문서 1764
[23] 문서 尾公口授
[24] 문서
[25] 서적 日本史小百科「貨幣」
[26] 서적 江戸の貨幣物語
[27] 서적 なぜ偉人たちは教科書から消えたのか
[28] 웹사이트 日本銀行金融研究所貨幣博物館:貨幣の散歩道 http://www.imes.boj.[...]
[29] 문서 秘書官
[30] 문서 寿光院
[31] 뉴스 将軍の肖像画、下絵はリアル 徳川宗家に伝来、研究進む https://archive.is/P[...] 朝日新聞 2012-08-08
[32] 블로그 鶴は千年、亀は萬年。 http://blog.goo.ne.j[...] 2012-08-08
[33] 문서
[34] 문서 마쓰다이라 가타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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